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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N불교TV2026년 6월 20일
BTN불교TV2026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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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현스님의 예불과 기도
2026년 6월 20일

십만대장정
2026년 6월 20일

자현스님의 예불과 기도
2026년 6월 20일

운이열리는 불교음악
2026년 6월 20일

3Dmall
2026년 6월 20일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정토한결
2026년 6월 20일
동참 가능 불사
• 가족 평화 기원 인등불사
• 소원성취 기와불사
• 대웅전 연등불사
2026년 6월 21일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2길 90
이곳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505-2에 위치한 불교 사찰 유적입니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보여주는 문화재로, 단아하면서도 균형 잡힌 구조가 인상적입니다. 주변은 고즈넉한 분위기로, 산책이나 명상하기에도 좋은 장소예요.
동참 가능 불사
• 대웅전 연등불사
• 소원성취 기와불사
• 가족 평화 기원 인등불사
2026년 6월 18일
경북 구미시 해평면 해평4길 86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 525-1에 위치한 불교 사찰입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의 작은 사찰로, 마음을 가라앉히기에 좋은 장소입니다. 자연 속에 자리해 있어 산책이나 명상에도 적합해요.!

동참 가능 불사
• 소원성취 기와불사
• 가족 평화 기원 인등불사
• 대웅전 연등불사
2026년 6월 17일
대구 군위군 고로면 현리낙전길 836-144
압곡사는 경북 군위군 고로면 낙전리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고즈넉한 분위기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산속에 자리잡은 조용한 사찰로, 명상이나 산책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방문객들 사이에서 자연과 어우러진 평화로운 분위기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2026년 6월 18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2길 400
옥천 용암사 동·서 삼층석탑 등 3건

동참 가능 불사
• 가족 평화 기원 인등불사
• 소원성취 기와불사
• 대웅전 연등불사
2026년 6월 18일
대구 군위군 부계면 원효길 340
오은사는 경북 군위군 부계면 원효길 340에 위치한 불교 사찰로, 천태종 소속의 신흥사찰입니다. 대웅전이 황금색으로 지어져 있어 **‘황금사찰’**로 불리며, 팔공산 하늘정원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해 있어 산책이나 기도처로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산신각에서 기도 후 아이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영험한 기도처로 알려져 있으며, 조용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로 힐링 여행지로도 인기가 있습니다

동참 가능 불사
• 가족 평화 기원 인등불사
• 소원성취 기와불사
• 대웅전 연등불사
2026년 6월 17일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운주로 957번지
봉황정사(鳳凰精舍)는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운주로 957(유하리 332-2)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입니다. 아래는 봉황정사에 대한 주요 정보입니다.정확한 창건 연대는 기록이 부족해 불분명하나, 지역 전통 사찰로 소규모 수행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직지사의 말사로, 조선시대 이후 직지사와 연계된 역사적 배경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봉황정사는 영천시 임고면의 산간 지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운주산 자락에 위치해 자연과 어우러진 조용한 분위기를 제공합니다.

2026년 6월 22일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120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이곳에 절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巖)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高宗) 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의 신(神)과 제압의 뜻인 륵(勒)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서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裨補)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초기 학승(學僧)인 신미(信眉)의 제자였던 김수온(金守溫)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形勝)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의 물이 감싸안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고찰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에 비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래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東臺)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신륵사는 창건 이래로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儺翁) 화상(和尙)과 같은 고승대덕이 지냈던 곳이며 더불어 그 경관이 뛰어난 사찰로 이름이 높다. 조선후기 문인 김병익(金炳翼)은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 1874년》에서 신륵사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儺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를 1.07:1로 구성하여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내부에 기둥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가구가 모이지 않는다.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현란하지 않으며 구조적으로 견실한 느낌을 주는 조선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63년 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양식면에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은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선당세계선〉에 의하면 고려 우왕5년(1397)에 진영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지공, 그리고 좌우에 무학과 나옹스님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중앙 지공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스님의 독존(獨尊)을 안치했다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다층 석탑은 흰 대리석을 재료로 사용한 특이한 예로 조형감각이 뛰어난 매우 우아한 석탑이다. 현재 탑의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으나 탑의 아래 부분에 새겨진 용과 구름 문양의 세부 조각은 우수한 기량을 보이고 있다. 현재 탑의 위치는 사찰의 구조로 볼 때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있던 원래 위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탑은 신라나 고려시대에 성행한 석탑의 조형 형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세부양식을 볼 때 이전 시대의 것과는 다른 조형 감각을 보이고 있다. 현재 파고다 공원 내에 있는 원각사지 圓覺寺址 10층석탑(조선 세조12년 1466년 국보 제2호)과 양수리 수종사 水鐘寺 팔각오층석탑(성종24년 1493)이 재질과 세부 양식면에서 신륵사 다층석탑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탑은 영릉의 원찰로 지정 되었던 성종3년(1472) 중창 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형태를 살펴보면 탑과 지면을 잇는 지대석 地臺石 네 면에 모두 연화문 蓮華紋을 조각하였으며 이 지대석과 본 탑의 몸체를 구분하는 갑석 甲石에도 역시 연화문을 새겨넣었다. 탑의 아랫부분 몸체에 섬세한 필치로 조각된 비룡문 飛龍紋과 구름무늬는 그 기법이 매우 능숙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워낙 자연환경에 약한 대리석으로 제작되어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고, 상륜부 上輪部 역시 결실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나 현재보다는 몇 층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경내의 동남쪽 강가에 아담한 동산 위에 세워진 이 전탑은 현존하는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다. 전탑이란 벽돌을 구워 탑을 쌓은 것으로 주로 중국의 탑들이 여기에 속한다. 벽돌로 된 탑이 있다는 의미로 신륵사는 예로부터 벽절 甓寺라고 불리었다. 강 상류의 댐이 건설되기 전에는 절벽 아랫부분의 강물이 매우 거세었다고 전하므로 강 절벽에 건축된 탑은 강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는 등대와 같은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에는 반원 안에 당초 唐草무늬가 새겨져 있지만 구성 자체는 수리를 거듭하는 사이에 원형을 잃어 당초문의 배열조합이 훼손되었다. 탑의 층수를 단정 짓기는 형태상으로 애매하지만 현재는 7층의 형식으로 보인다.
이 탑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고, 벽돌의 문양과 전체적인 형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륵사대탑중수비 신륵사 神勒寺東臺塔重修碑》의 [崇禎紀元之丙寅仲秋日立] 기록에 따라 조선 영조 2년(1726)에 중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찰의 중심구역이 아닌 사찰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별개의 장소에 이 탑을 건립한 것은 신라 말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자생적인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신륵사의 조사당을 지나 양지 바른 구릉을 오르면,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탁트인 남한강이 굽어 보이는 곳에 보제존자 나옹스님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이 곳은 오대산 줄기가 연방산, 덕고산, 공작산, 오음산, 부동산, 목방산, 고달산, 우두산을 거쳐 여강에 꼬리를 담그는 봉미산 주맥이 정기를 모아 고개를 들고 있는 명당자리로 감여술, 즉 지리학에 정통하였다는 무학대사가 스승의 묘자리로 가히 삼을 만 한 곳이다.
나옹선사의 입멸 3년 후인 1379년에 건립된 부도는 종 모양을 닮았다하여 석종이라 하였다. 넓은 기단의 전면과 측면에는 모두 계단을 만들고, 기단은 여러 개의 석재로 쌓아 올려 그 중앙에 부도를 안치하였는데 이러한 형태는 통도사나 금산사의 계단사리탑 戒壇舍利塔의 형태와 유사하다. 탑신은 종 모양으로 표면에 조각을 하지 않은 중후한 멋을 자아내며 탑의 정상부분에는 화염문을 본따 만든 보주 寶珠가 얹혀있다.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했던 고려시대 다른 부도에 비해 이 부도는 완전히 그 형태를 벗어나 새로운 조형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특수한 것이다. 이러한 단순화된 부도의 형태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소위 오늘날 사원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부도의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
신륵사의 조사당을 지나 양지 바른 구릉을 오르면,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탁트인 남한강이 굽어 보이는 곳에 보제존자 나옹스님의 부도가 모셔져 있다. 이 곳은 오대산 줄기가 연방산, 덕고산, 공작산, 오음산, 부동산, 목방산, 고달산, 우두산을 거쳐 여강에 꼬리를 담그는 봉미산 주맥이 정기를 모아 고개를 들고 있는 명당자리로 감여술, 즉 지리학에 정통하였다는 무학대사가 스승의 묘자리로 가히 삼을 만 한 곳이다.
나옹선사의 입멸 3년 후인 1379년에 건립된 부도는 종 모양을 닮았다하여 석종이라 하였다. 넓은 기단의 전면과 측면에는 모두 계단을 만들고, 기단은 여러 개의 석재로 쌓아 올려 그 중앙에 부도를 안치하였는데 이러한 형태는 통도사나 금산사의 계단사리탑 戒壇舍利塔의 형태와 유사하다. 탑신은 종 모양으로 표면에 조각을 하지 않은 중후한 멋을 자아내며 탑의 정상부분에는 화염문을 본따 만든 보주 寶珠가 얹혀있다.
매우 장식적이고 화려했던 고려시대 다른 부도에 비해 이 부도는 완전히 그 형태를 벗어나 새로운 조형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특수한 것이다. 이러한 단순화된 부도의 형태는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소위 오늘날 사원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부도의 형태로 정착하게 되었다.
대장각기비는 고려 말 목은 牧隱 이색 李穡이 공민왕 恭愍王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 門徒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 碑身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 석종비 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이승인 李崇仁이 지은 비문은 당시 직제학 권주 權鑄가 쓴 자경 2cm의 해서체 楷書體로 탑신에 깨어진 부분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아쉽게도 비를 세운 연대 역시 탈락이 되어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대체로 보제존자 석종비 제작 4년 후인 홍무 洪武 16년 (1383)으로 추정된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 經·율 律·론 論 삼장 三藏을 인출하며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금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층전탑 위쪽으로 이 비만 남아있다.
보제존자 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 供養具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 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은 대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상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건물은 정조 21년(1797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것이다. 지금의 극락보전이 그 이전의 불전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겠는가에 대하여는 근거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위치와 규모, 그리고 건축형식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의 천정은 우물천정이며 불단 반형은 정교하게 짜여진 닫집이 있고, 불단 위치처는 수미열마나단청은 안상 형식마나창 속에 학, 연꽃, 코끼리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극락보전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 구전되어 오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
신륵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보살상의 보관과 대좌가 후보(後補)된 것을 제외하곤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주존인 불상을 좌상으로 하고 협시상을 입상으로 한 구성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이다. 불상과 보살상들은 모두 상호와 상체가 긴 편인데, 특히 불상의 육계는 유난히 길게 조성되어 이색적인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상의 큼직큼직한 나발과 단순하게 처리한 법의 자락은 조선초기부터 내려오던 특징이다. 불상의 눈먼저리에 보이는 다크서클 같이 처리한 음영 기법이나 아래 입술을 도톰하게 만들어 처지게 표현한 것 등은 조각승 인일(仁日)과 수천(守天)의 조형 미감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보살상들은 조성발원문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조선시대 1610년에 조성되었는데, 1620년의 약수선원 보살입상(현 동국대박물관 소장)과 전체적으로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들 보살상 중 좌협시보살상은 천의식으로, 우협시보살상은 대의식으로 법의를 착용하고 있다. 한편 좌협시보살상의 양쪽 어깨 위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의 표현법과 하반신 중앙에 타원형을 그리며 드리워져 있는 화려한 장엄, 우협시보살상의 보발이 귀 밑에서 정리되는 표현법 등은 가장 중요한 특징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협시보살상의 보발 장식은 경기도 광주 수도사 보살상과 서울 봉은사 관음보살상과 유사한데, 이들 보살상 역시 17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륵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조성자와 조성시기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인일이라는 새로운 조각승의 이름이 확인되어 향후 조선시대 불상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작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신 사찰의 중심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으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과 함께 중생들의 수명장수와 안락을 도와주시는 분이다. 신륵사가 과거 영릉의 원찰로 지정되었으므로 극락보전은 왕실의 안녕과 선왕의 명복을 비는 기능을 가진 전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우왕 5년(1379) 나옹선사의 입적 후 각신(覺信)과 각주(覺珠) 등의 스님이 주전각을 중창하였고 세종의 22년(1440년)에 중수를 거쳐 영릉의 원찰이 된 후 극락보전이라 명명하고 성종 4년(1473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경내 중심에 위치하고 정남향을 한 현재 이 극락보전의 건물은 정조 21년(1797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것이다.
지금의 극락보전이 그 이전의 불전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겠는가에 대하여는 근거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위치와 규모, 그리고 건축형식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의 천정은 우물천정이며 불단 반형은 정교하게 짜여진 닫집이 있고, 불단 위치처는 수미단형식의 단창 속에 학, 연꽃, 코끼리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극락보전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 구전되어 오는 ‘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
신륵사 홈페이지 참고

동참 가능 불사
• 등불사
• 대웅전 연등불사
• 기와불사
2026년 6월 21일
경북 영천시 청통면 은해사로 300
은해사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사찰로, 경북 5대 본산 중 하나이며 조선 31본산에도 포함될 만큼 역사적·문화적 비중이 큰 사찰입니다. 특히 보물 제1270호 은해사 괘불탱, 추사 김정희의 다수 친필 현판, 깊은 역사와 전설, 아미타불을 모시는 미타도량으로 유명합니다.
현 명칭: 조선 인종 원년(1545) 화재 이후 현재 위치로 옮기며 ‘은해사’로 개칭 교구: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 대표 문화재: 보물 제1270호 은해사 괘불탱, 염불왕생첩경도(보물 1857호) 등 특징: 추사 김정희의 현판 다수, 미타도량, 팔공산의 대표 사찰
주요 전각 & 볼거리 대웅전 — 아미타불·관세음보살·대세지보살을 모신 주불전. 추사 김정희의 원래 현판은 성보박물관에 보관.
보화루 — 사찰의 해탈문 역할을 하는 2층 누각. 추사 친필 편액이 걸려 있음. 설선당 — 승가대학 강의실·회의실로 사용되는 공간. 단서각 — 석가모니불과 16나한을 모신 나한전. 산신각 — 팔공산 산신을 모신 전각. 성보박물관 — 괘불탱·추사 현판 등 귀중한 문화재 소장.
은해사의 전설 — 쌍거북바위 일제강점기 훼손되었다가 2005년 복원 과정에서 일부가 실제로 발견됨. 과거에는 갓바위 부처와 견줄 만큼 유명한 소원성취 기도처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참 가능 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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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평화 기원 인등불사
2026년 6월 21일
경북 구미시 선산읍 죽장2길 90
이곳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죽장리 505-2에 위치한 불교 사찰 유적입니다.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보여주는 문화재로, 단아하면서도 균형 잡힌 구조가 인상적입니다. 주변은 고즈넉한 분위기로, 산책이나 명상하기에도 좋은 장소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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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연등불사
2026년 6월 21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월계길 739
신라 문무왕 13년(673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에요. 이름 그대로 ‘지혜의 상징인 독수리가 깃든 절’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문수보살의 도량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대웅전: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로 모신 법당 보물 제995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목조광배가 봉안된 전각(보광전) 삼존불 노천법당: 높이 13m의 아미타삼존석불이 야외에 조성된 장엄한 불단 보탑성전과 사리탑: 미얀마에서 이운된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5층 석탑과 법고, 목어, 운판이 함께 있는 전통 범종각,금곡 무여 큰스님이 주석하는 수행 공간(염화실) 있으며 문수산의 수려한 풍광과 금강송 숲이 어우러진 청정 수행처 참선, 명상, 철야정진, 쉼 프로그램 등 다양하게 운영 중 이며 축서사 보물 제1379호로 지정된 대형 불화(괘불탱화), 조선 영조 44년(1768) 제작, 창건 설화로는 의상대사가 광채를 발하는 비로자나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 풍수지리 명당의 산세가 독수리 형국이라 ‘축서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어요. 축서사 창건 3년 후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며 ‘축서사가 부석사의 큰집’이라 불리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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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19일
경북 경주시 문무대왕면 기림로 437-17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천년고찰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인도 승려 광유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창건 시기로는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 광유 스님 창건. 원효대사 (임정사를 확장하여 기림사로 개칭) 주요 건축물로는 대적광전, 응진전, 약사전, 진남루, 천왕문, 일주문 있으며 주요 문화재로는 대적광전(보물 833), 건칠보살좌상(보물 415), 삼신불(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오백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214)가 있어요. 특징으로는 평지사찰 구조, 조선후기 경주지역 대표 사찰, 승병활동 중심지였던 진남루. 역사적 배경은 임정사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으며, 원효대사가 중창하여 기림사로 개칭. 조선 철종 14년(1863)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지방관 송정화의 도움으로 중건됨. 조선시대에는 경주 관아의 후원을 받아 크게 번창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정도로 위세가 높았음.

2026년 6월 18일
충북 옥천군 옥천읍 삼청2길 400
옥천 용암사 동·서 삼층석탑 등 3건

조사당(祖師堂)을 거쳐 절 뒤편 보제존자(菩提尊者_ 나옹선사) 석종부도(石鐘浮屠)가 있는 곳으로 가는 길에 다른 부도 둘을 만났다.
여주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圓球形石造浮屠)와 팔각원당형석조부도(八角圓堂形石造浮屠)이다.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 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를 1.07:1로 구성하여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내부에 기둥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조선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63년보물 제180호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양식면에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은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진당시병서>에 의하면 고려 우왕5년(1397)에 진영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중앙 나옹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스님의 독존(獨尊)을 안치했다.
나옹화상의 승탑은 절의 서북쪽 언덕 위에 있었다. 보제존자(普濟尊者)는 1371년(공민왕 18)에 왕사(王師)가 되어 왕으로부터 받은 호이다.
나옹선사(懶翁禪師)의 부도는 규모가 작고 화려함이 덜하지만 통도사나 금산사의 금강계단을 연상시킨다.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노력한 나옹의 업적이 반영된 것이리라.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鐘)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가 솟아 있다.
이색과 나옹, 두분이 태어난 곳은 경북 영덕이고 죽은 곳은 여주 여강이다.
탑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라 한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나옹과 이색은 서로 특별한 인연이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원나라 유학을 다녀왔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공민왕과의 돈독한 친분을 가졌으며 당대의 선각자로 촉망 받았다
그러나 생전에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옹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때에도 이색은 나옹을 찾지 않았다. 입적했을 때도 왕명에 따라 그의 사리석종기(舍利石鐘記)를 썼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길이 다르면 서로 꾀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랐던 것이다. 불가와 유가는 확연히 다른 길이었다.
나옹은 우왕과 집권세력의 견제로 먼 길을 떠나다 병을 얻어 신륵사 강월헌에서 세상을 떠났고, 나옹의 사리석종기를 쓴 이색은 강월헌에서 멀지 않은 연자탄(燕子灘_ 제비여울)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태조가 보낸 독배를 마시고 배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나옹이 죽은 지 20년 뒤이다.
둘이 태어난 곳도 영덕이고 죽은 곳도 여주 여강(驪江)이다. 그래서 영덕 장육사에 가면 나옹선사의 기념관이 있고 이색의 기념관은 영해 괴시리 마을 뒷산에 있다.
※ 여강(驪江)_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供養具)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火舍石)은 대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신륵사에 새로운 이름을 신륵사 다층석탑 신륵사는 ‘벽절’이라고도 불렸다고 하였던 것은 벽돌로 만들어진 저 탑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탑(塼塔)은 점토로 벽돌 모양을 만든 다음 뜨거운 가마에 구워낸 후 한층 한층 쌓아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석탑이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반면 전탑은 일부지역에만 세워졌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만드는 것도 복잡하고 어려웠기 때문이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 신륵사에 있는 이 다층전탑이다. 이 탑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일부러 절의 중심에서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하는데, 고려시대 유일의 전탑으로 높이 9.4m이며 보물 제2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해 7개의 층단을 만들고, 탑신부는 여러 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매우 간략하게 꾸몄다.
다층전탑 근처에 비각 하나가 있다. 비석은 크게 파손되어 겨우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라 전문의 판독은 불가하다고 한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장방형 복련대석(覆蓮臺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간단하게 변화된 모양인데, 비신(碑身)의 보호를 위하여 양쪽에 돌기둥을 붙여 단단히 지탱하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이 같은 모양은 이후 조선시대 석비 조형의 한 형식이 되었다는데, 전에 합천 삼가에서 살펴 보았던 남명 선생의 부친 조언형(曺彦亨)의 묘갈이 떠오르게 한다.
원래 신륵사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서쪽 언덕에 대장각(大藏閣)이 있었는데, 그것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과 승려 나옹(懶翁)의 문도들이 발원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하여·수장하던 곳이었고, 이 비는 대장각의 조성에 따른 여러 가지를 기록한 석비이다.
이색은 선왕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발원하였다. 비문은 해서(楷書)로서, 직제학 권주(權鑄)의 글씨이다. 달은 부처이고 강은 중생이다.
강월헌(江月軒)이 삼층석탑과 함께 남한강변의 가파른 바위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동대(東臺)라고 불려지는 거대한 암반이다. 문객들이 달밤에 동대에 올라 여강에 비친 달을 보며 시를 읊으며 풍유를 즐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명승지였던 모양이다.
이색(李穡)이 시를 썼고, 권근(權近) 역시 이곳을 찾아 시를 남겼다.
이식(李植), 김창협(金昌協), 정두경(鄭斗卿) 외에도 다산 정약용도 동대에 올라 시를 썼다고 한다. 현재의 강월헌이 있는 자리는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선사 혜근(惠勤)의 다비 장소였는데, 그의 문도들이 정자를 세우고 그의 호를 따서 강월헌이라고 당호를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깨달음을 얻고 주지로 있었던 양주 회암사(檜巖寺)의 처소이기도 하다.
본래의 누각은 혜근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3층석탑과 거의 붙어 있었으나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가자 1974년 3층석탑보다 조금 더 아래쪽에 철근과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다시 지었다고 한다.
나옹화상이 신륵사에 입적하게 된 이유가 특별하다. 나옹은 공민왕과 우왕으로부터 왕사로 추대됐다가 밀성군(密城郡_ 현 경남 밀양)으로 내쳐졌다. 그때 나옹은 회암사(檜巖寺)의 주지가 되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문수회(文隨會)를 베풀었다. 중앙과 지방의 남녀 노소, 귀한 사람 천한 사람 가릴 것 없이 구름 같이 몰려 포백과 과실 떡을 보시했다.
하늘을 찌르는 인기는 우왕과 우왕을 둘러싼 집권세력에게 위협이 됐다. 유생들은 과도한 토목공사라며 나옹을 탄핵했다. 왕은 선사를 밀양의 영원사(瑩源寺)로 내쳤다. 그가 떠나면 신도들이 잠잠해질 것이라 기대햐였을 것이다. 그러나 쫓겨나는 나옹을 보면서 백성들은 통곡했다.
나옹은 길에서 병을 얻었고, 한강에 이르러자 병세는 더욱 심해졌다. 배를 타고 이레만에 신륵사에 도착했으나, 1376년 5월 15일 열반하였다. 세속 57세, 법납으로 37세였다.
강월헌에 오르니 남한강의 청량한 물줄기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은 서로 어루러져 절로 감회에 젖어 만든다. 여주 사람들은 신륵사 앞을 가로 질러 여주를 관통하는 저 남한강을 여강(驪江)이라 부른다고 한다.
첫 구절이 입에 맴도는 나옹선사의 시 한 편을 옮겨 본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愛而無憎兮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聊無怒而無惜兮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로타리 불자회 지도법사 보명올림
2026년 6월 20일

복장은 너무 화려하거나 지나치게 노출되지 않는 옷으로 깨끗하고 단정하게 입습니다. 조용히 말하고 행동하도록 하며, 큰 소리로 떠들지 않도록 합니다. 경내에서는 급하다고 뛰어다니거나 신발을 끌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사찰은 공동생활 공간이므로 사용한 물건은 반드시 제자리에 놓으며, 항상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법당을 출입할 때는 가운데 문으로 다니지 말고 옆문으로 출입합니다. 신발은 언제나 가지런히 벗어서 놓습니다. 문을 열고 닫을 때 조심스럽게 하여 요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합니다. 부처님의 정면은 스님 자리이므로 중앙을 피하여 좌우에 앉습니다.
스님은 불자들의 귀의처인 삼보 중 하나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불자들에게 올바른 신행 생활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스님은 중생의 복전이 되므로 공경스러운 마음으로 예배합니다.
기상, 취침, 공양은 해당 사찰이 정하는 일정에 따라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해야 합니다. 공양할 때는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되며, 자기가 먹을 만큼만 적당히 덜어서 먹습니다. 세면과 칫솔질은 정해진 장소에서 하고, 세면이 끝난 후에는 정돈되지 않은 복장으로 도량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일주문을 넘어서 부처님 도량에 들어서거나 나올 때 법당에 첫발을 들여놓거나 나올 때 절을 시작하기 전이나 끝날 때 경내에서 스님이나 불자님과 인사할 때
2026년 6월 18일

삼보(부처님, 법, 스님)에 대한 예경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의 수행입니다. 대개 참회나 기도의 방법으로 108배, 1080배, 3000배 등을 합니다.
큰절은 신체의 다섯 군데를 땅에 닿게 하는 것으로 이마, 양 팔꿈치, 양 무릎을 말합니다. 이는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것입니다.
3배 또는 108배나 3000배 등 절을 할 때, 마지막 절을 한 다음 몸을 일으키지 말고 머리를 들어 이마를 땅에서 뗀 후, 합장하고는 본인의 소원을 간단히 (1~2초간) 기원합니다.
양손을 바닥에 대고 이마를 다시 바닥에 살며시 댄 다음 일어선다.
일어서서 합장 반배 한다.
2026년 6월 18일

보명의 3월 초하룻날의 법문. 제목 : 기도(祈禱)란 ?.
'기도(祺禱)'란 다겁생에 지은 죄업과 현생에 길들여진 잘못된 가치관과 습관을 부수어 자신의 업장을 소멸시키고,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다.*
또한, 기도(祈禱)란 부처님의 길을 따르고자 하는 원(願)을 세우고,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세상을 올곧게 살아가는 힘과 믿음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기도란 올바르게 살려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신념과 불보살님의 가피력을 입으려는 믿음의 표현이다. 기도의 방법은 스스로 원(願)을 절, 염불, 독경, 간경, 사경, 주력, 정근 등을 하며, 일심으로 정진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대표적인 것이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아미타불' 염불이 대표적이다. 이에, '석가모니불' 염불은 기본이고, '관세음보살' 염불, 지장보살' 염불, '약사여래불' 염불, '화엄신중' 염불도 열심히 한다.
법신염불: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를 생각하는 염불
관념염불: 부처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는 염불
칭명염불: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부르는 염불 --> 흔히 쓰이는 염불.
독경(讀經): 일심으로 소리내어 경을 외거나 읽는 것. 전경(轉經: 경을굴린다)이라고도 함.
간경(看經): 경전을 보고 마음속으로 읽는 수행법
사경(寫經): 경전을 서사(書寫), 즉 보고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일자일배(一字一拜)하면서 지극한 마음으로 반야심경, 금강경 등을 옮겨 적음으로써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업장을 소멸하는 수행이 사경기도(寫經祈禱)이다.
권자본(卷子本) - 두루마리 형태
절첩본(折帖本) - 병풍 형태
선장본(線裝本) - 족보책 형태
주력(呪力): 불, 보살님의 명호나 진언(眞言)의 다라니를 일념으로 염송하는 것을 말한다.
진언(다라니)에는 모든 공덕을 지니다는 '총지(總持)', 모든 잘못을 막는다는 '능차(能遮)' 의 뜻을 가지고 있다.
주력기도 진언으로 천수경의 관세음보살 본심미묘육자대명왕진언인 옴마니반메훔과 신묘장구대다리니, 광명진언, 능엄신주 등이 이용된다.
불기 2570년 4월17일의 병오년 3월 초하룻날에. 팔공산 감고사지기 보명올림
2026년 6월 11일

보명법사의 신묘장구대다라니 3×7=21일 기도 7일.
(7)「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한하」(3번)
이 부분은〈신묘장구대다라니〉의 맨 처음에 나왔던 구절인데 맨 마지막에서도 다시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 뜻은 '삼보께 귀의하며 받드옵니다. 성스러운 관자재보살에게 귀의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삼보와 관세음보살에 대한 끝없는 예배와 존경심의 표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보와 관세음보살께 귀의함이 바로 불교를 신앙하는 기본적인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신묘장구대다라니>의 내용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해석해 보았는데 범서의 원래 이름은〈마하 가로니까야 흐리다야 다라니〉, 즉〈대비심 다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다라니〉의 완벽한 풀이는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라니〉속에 담긴 대강의 뜻이라도 이해함으로써 더욱 분발하는 신심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에 보다 더 가까이, 또 깊이 있게 접근하여 관세음보살의 위력이 각 가정과 사회에 널리 퍼지게 함에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을 조화롭게 갖추고 있는 종교입니다. 근래에 와서 불교의 경향이 옛날의 맹목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서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활발하게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실천을 통해서 복을 닦는 일이 오른쪽 날개라면 법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왼쪽 날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쪽 날개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새가 날수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는 복과 지혜를 똑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기도를 하고 참선을 하고 독경을 하는 밑바탕에는 불교적 이치가 깔려 있어야만 완전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불법 안에는 이러한 두 가지, 즉 아는 것과 실천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불자라면 그 두 가지 원칙을 도외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곳에 처하든지 부처님의 올바른 사상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길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 부산을 간다면 우선 가는 길을 정확히 알고 나서야 목적한 곳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알기만 하고 가지 않거나, 가는 길을 모른다면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이 두 가지가 원만히 구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라고 할 때 거기에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느 시대, 어느 곳,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영원불멸인 것입니다.
현대인은 다양하고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심지가 굳은 올바른 견해가 없으면 금방 잘못된 곳으로 휩쓸려 가정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맙니다.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면 적어도 지행일치 (知行一致)의 안목을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의 의무입니다.
불법을 배우고 불자로서의 의무를 실천할 때 우리가 속한 가정과 이웃은 물론 더 나아가 이 사회가 보다 건전한 방향으로 전환될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불기 2570년 4월 17일 병오년 3월 초하룻날에 팔공산 감고사지기 보명합장.
2026년 6월 11일

**보명법사의 신묘장구대다라니 3×7=21일 기도 6일째. **
(6) 계속해서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매다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하라나야 마낙 사바하 싯다야 사바하 마하싯다야 사바하 싯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 니라간타야 사바하 바라하 목카싱하 목카야 사바하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 상카섭나녜 모다나야 사바하 마하라 구타다라야 사바하 바마사간타 이사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 먀가라잘마 이바사나야 사바하
위의 내용은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마지막 부분인데,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여러 가지 역할과 위신력에 따라 붙여진 열두 가지의 상징적인 이름에 해당됩니다.
관세음보살은 항상 자비스러운 모습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때로는 위엄스러운 모습으로, 때로는 화엄신장과 같은 두려움을 가진 존재로서 불법을 지켜주는 분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때와 장소에 따라 관세음보살이 어떤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 <매다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하라나야 마낙 사바하>에서 <매다리야>는 <마이트라야>라고 하여 미륵보살의 이름인데 '자비스러운, 인정이 깊은'의 뜻이 있습니다.
<니라간타>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청경관음 (靑頸觀音)'이란 뜻입니다. <가마사>는 '욕망, 원망(願望)'의 뜻이며, <날사남>은 '부수다, 파괴하다'의 뜻입니다. <바라하리나야>는 악마왕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인 악마를 따르지 않고 정법을 따른 자입니다. <마낙>은 ‘마음’이란 뜻이며, <사바하>는 여러번 나온 단어로서 '성취, 원만, 구경, 완성'등의 뜻이 담긴 종결어미로서 별도로 번역하지 않습니다.
<매다리야 니라간타 가마사 날사남 바라하라나야 마냑 사바하>까지가 관세음보살의 첫 번째 이름입니다. 이것을 연결해서 해석하면 '자비심이 깊으신 청경관음존이시여, 욕망을 부숴 버린 님의 마음을 위하여'가 됩니다.
두 번째의 이름인 <싯다야 사바하>에서 <싯다야>는 '성취'의 뜻이 있으니 <싯다야 사바하>는 말 그대로 '성취하신 분을 위하여'가 됩니다.
세 번째의 이름인 <마하싯다야 사바하>에서 <마하>는 '크다', <싯다야>는 ‘성취’의 뜻이므로 이것은 ‘위대한 성취존을 위하여’가 됩니다.
네 번째 이름인 <싯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에서 <싯다>는 ‘성취’, <유예>는 다른 말로 <요가>라고 표기하며 <새바라야>는 '자재(自在)'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싯다유예 새바라야 사바하>는 '요가를 성취하신 자재존(自在尊)을 위하여' 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다섯 번째의 이름인 <니라간타야 사바하>에서 <니라간타>는 '청경관음'이란 뜻이니, 이것은 '청경관음존을 위하여'가 됩니다.
여섯 번째의 이름인 <바라하 목카싱하 목카야 사바하>에서 <바라하>는 '산돼지', <목카>는 '얼굴', <싱하>는 '사자'라는 뜻이니 이것은 '산돼지 얼굴, 사자 얼굴을 한 관세음보살을 위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곱 번째의 이름인 <바나마 하따야 사바하>에서 <바나마>는 '연꽃'의 뜻이고, <하따야>는 ‘잡다’는 뜻으로 이것은 ‘연꽃을 손에 잡으신 관음존을 위하여’가 됩니다.
여덟 번째 이름인 <자가라 욕다야 사바하>에서 <자가라>는 ‘크고 둥근 바퀴’, <욕다야>는 ‘지니다’의 뜻이니 이것은 '큰 바퀴를 지니신 관음존을 위하여'가 됩니다.
아홉 번째의 이름인 <상카섭나녜 모다나야 사바하>는 <상카 섭나 녜모다나야 사바하>로 띄어 읽어야 합니다. <상카 섭나>는 '법(法) 소라 나팔 소리'라는 뜻이며 <녜모다나야>는 ‘깨어나다’라는 뜻이니 이것은 '법 소라 나팔 소리로 깨어난 관세음보살을 위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열 번째의 이름인 <마하라 구타다라야 사바하>는 <마하 라구타 다라야 사바하>로 띄어 읽어야 합니다. <마하>는 '크다', <라구타>는 '곤봉, 금강저'이라는 뜻이며, <다라야>는 '가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금강저를 가진 관음존을 위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열한 번째의 이름인 <바마사간타 이사시체다 가릿나 이나야 사바하>에서 <바마>는 '왼쪽'이란 뜻이며, <사간타>는 '어깨'라는 뜻입니다. <이사>는 '곳, 장소'라는 뜻이고, <시체다>는 '굳게 지키다'는 뜻입니다. <가릿나>는 '흑색(黑色), 신승존(身勝尊)'이라 하여, 인도 힌두 신화의 크리슈나를 가리킵니다. <이나야>는 '승리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왼쪽 어깨쪽을 굳게 지키는 흑색의 승리자이신 관음존을 위하여'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열두 번째의 이름인 <먀가라잘마 이바사나야 사바하>에서 <먀가라>는 '호랑이'라는 뜻이며, <잘마>는 '가죽'이란 뜻입니다. <이바사나야>는 '머물다'라는 뜻으로 '호랑이 가죽위에 머물러 있는 관음존을 위하여'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관세음보살의 열두 가지 이름을 낱말 하나하나의 뜻을 새겨 보면서 그 의미를 풀이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관세음보살이 과거에 보살행을 할 때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흔히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자비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어떤 때는 호랑이 가죽위에 머물러 있으며, 또 어떤 때는 전투하는 모습을 한 관세음보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상징하는 진정한 숨은 뜻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관세음보살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넓고 깊은 관세음보살의 이력을 낱낱이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불기 2570년 4월 16일 팔공산 감고사지기 보명합장.
2026년 6월 11일
